김장환 목사 부인 트루디 여사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11-08-27 09:27     조회 : 2543    

몸뻬바지, 앞치마, 손은 이웃을 향해… ‘
한국살이 52년’ 김장환 목사 부인 트루디 여사

몸뻬바지 차림으로 호미를 들고 학교 화단에서 일하는 그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목격되곤 했다.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를 개교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그가 큰며느리와 학교 수영장 청소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며느리에게 “어머, 저 외국인 청소부 어디서 구했어요? 굉장히 열심히 일하네”라고 했다. 며느리가 “우리 시어머님이에요”라고 볼멘소리를 하자 그는 민망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세계침례교총회장을 지낸 김장환(극동방송 회장·77) 목사의 부인 트루디(Trudy kim·73) 여사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52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손은 이웃을 향하게 하라’는 소신대로 살았다. 수원 중앙기독유치원 원장을 지내면서 수원교도소 여성수감자들에게 10여년 동안 영어성경을 가르쳤고, 중앙기독초등학교 내에 있는 ‘트루디 파이 숍’에선 직접 만든 빵을 팔아 장애아동을 도왔다.

2006년엔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족들과 친지들의 기도로 건강을 회복한 그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요바 린다에 살고 있는 딸 애설씨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최근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십시오’(나침반)를 출간한 그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한국인으로 살아온 세월의 필름을 되돌려 보았다.

트루디 & 빌리

갈색 머리에 갈색 눈, 160㎝ 남짓한 작은 키. 어쩌면 그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맞춰준 최적의 신체조건이 아니었을까. 그는 작은 체구 덕분에 빌리(Billy:김장환 목사)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고 했다. 어린시절 친구들이 그를 ‘벼룩(frea)’이라 불렀을 정도로 작고 귀여웠다.

미국의 밥 존스 고등학교에서 빌리는 꽤 유명했다. 빌리는 동양
인이었지만 축구부 주장이었고 웅변대회 상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미시간 주 그린빌 지역대회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대회 그리고 전국대회까지 휩쓸었다. 한국인 유학생이 미국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최고상을 받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교내 음악회를 앞두고 다섯 명에게서 초청장을 받았다. 빌리도 그중 한명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빌리는 여학생에게 인기가 많았음에도 가난한 동양인 남학생한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짐작해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고 했다. 트루디는 품행이 단정하고 명랑해 재단 총장의 아들인 밥 존스 3세로부터 데이트를 신청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귀엽고 싹싹한 빌리가 좋았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빌리가 대학교 2학년 때 정식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첫 데이트 후 헤어질 때 빌리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헤어지기 전에 기도하자 우리.” ‘우리’란 말에 가슴이 뛰었다. 고등학교 졸업 반지를 서로 바꿔 끼고 미래를 약속했다. 트루디가 대학을 졸업한 지 일주일 만인 1958년 8월 8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뿌리 내린 곳에서 활짝 피어나리

59년 12월 12일 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화물선 ‘메이든 크리크라’는 17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항구의 불빛들이 참 아름다웠다. 배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갑판에 나갔다. 아름답던 불빛은 알고 보니 수많은 오두막집에서 나온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장환이 색시냐? 예쁘게 생겼구나. 꼭 한국사람 같네.” 며느리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배에서 내린 순간부터 그는 한국 며느리가 되기로 결심했다. ‘뿌리 내린 곳에서 활짝 피어나리라’(Bloom where you are planted)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국 땅에 심겨져 꽃을 피우고 싶었다. “식물은 심겨진 자리가 싫다고 옮겨갈 수 없어요. 오히려 비바람 치고 폭풍우가 불어도 그 자리에서 견뎌낼 때 가장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죠.”

그러나 낯선 한국 땅에서 세 자녀를 낳고 키우는 데 어려움도 많았다. 당시 국제결혼은 흔하지 않은 일. 미국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아이들은 여러 모로 힘겨워했다. “어머니 전 도대체 한국 사람이에요? 미국 사람이에요? 사는 게 참 힘들어요.” 10살밖에 안 된 장남 요셉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가슴이 미어졌다. 점심으로 싸간 샌드위치를 보고 아이들이 놀려서 굶었다고 했다. 요셉은 “엄마가 미국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덜 힘들었을 텐데”라며 뾰족한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방바닥에 코를 대고 잤다.

자녀들은 서울에 있는 외국인 학교에 가길 원했다. 하지만 남편은 “우리 아이들은 엄연한 한국인이에요. 그러니 한국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게 당연해요. 처음엔 힘들겠지만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아이들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등에 데리고 다녔다. 요셉은 후에 아버지가 논산 훈련소의 수많은 장병들 앞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보며 콤플렉스를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자녀들의 흔들리던 정체성은 남편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자리 잡아 갔다.

트루디 여사는 체벌 받은 아이가 더 잘 큰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남편이 혁대로 자녀들의 종아리를 때렸다고 했다. 어찌 보면 가혹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데 혁대의 공이 컸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개 밥 주기, 설거지, 방 정리, 정원 가꾸기 등 집안에서 각자 해야 할일을 정해주었어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왜 맞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종아리를 때린 후 꼭 안고 기도해 주었어요.”

장남 요셉 목사는 수원 원천교회, 차남 요한 목사는 대전의 함께하는교회를 개척했다. 딸 애설씨는 미국에서 사업하는 교포 자녀와 결혼해 미국에 살고 있다. 자녀들은 모두 한국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유학 비용은 장학금이나 아르바이트로 해결하도록 했다.

절제와 나눔

남편은 선교 초기 여러 가지 일을 해도 월급은 한 곳에서만 받는다는 원칙을 세운 뒤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남편은 66년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지만 사례비는 80년부터 받기 시작했다. 극동방송 사장으로 오래 일했지만 방송국에서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 집회에서 받은 사례비도 모두 극동방송국에 보낸다.
그 철칙은 두 아들에게로 이어져 요셉 목사와 요한 목사도 교회에서만 사례비를 받고 집회에 참여해 받은 사례비는 모두 선교헌금으로 쓴다. 트루디 여사 역시 79년부터 지금까지 중앙기독유치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지 않았다. “6·25 전쟁 당시 미군 하우스보이 생활을 했던 남편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도 누군가를 돕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아요.”

그는 생활비가 필요할 때마다 남편에게 조금씩 타서 썼다. “여보, 한 번에 좀 많이 줘 봐요” 남편은 교회에 통장을 맡겨 놓았으니 꼭 필요하면 얼마씩 찾아 쓰도록 했다. 부리나케 교회 사무실로 찾아가 돈을 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3만원을 건네줬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기뻤다. 한번은 미국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돈을 달랬더니 “사모님, 죄송한데 이번 달에 세 번 다 찾아가셨기에 더 드릴 수가 없어요. 목사님이 한 달에 세 번 이상은 주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요즘은 100만원이 조금 넘은 돈을 생활비로 받고 있다. 교회 직원들은 그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놀라지만 여사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미국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돌아온 요셉 목사가 94년 개교한 중앙기독초등학교에 ‘파이 숍’을 냈다. 그가 이곳에서 빵을 굽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수익금을 학교에 다니는 장애인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기 위해서다. 중앙기독초등학교는 정원의 10%를 뽑고 있는 장애아들이 홀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시설을 갖춘 사립학교로 장애아들을 비장애아들과 함께 통합교육시킨다.

투병으로 다시 만난 하나님

2006년 가을, 미국에서 초청 강연 중이었다.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 “암이 많이 진전된 상태입니다. 다발성 골수종 3기입니다.” 뜻밖의 진단이었다. 수술과 치료 과정이 험난했다. 척추의 일부를 절단했기에 처음엔 제대로 걷지 못했다. 걸음걸이 하나하나를 배우며 주님께 감사했다. “제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을 처음부터 다시 알게 해주시고 제 마음을 낮춰주시니 감사합니다.”

수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됐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난 다음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성령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너에게 이런 고통이 없었다면 나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었겠느냐. 이렇게 작은 일에도 감사할 마음이 들었겠느냐. 네가 아파할 때 나 역시 십자가를 지며 걸었고, 네가 고통 속에서 울 때 나도 함께 눈물 흘렸다.”

그는 평생을 함께해 온 말씀이 있다고 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내어주신 것처럼 저도 저의 삶을 조금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빛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심겨진 곳에서 꽃을 활짝 피운 것이 분명했다.
 
글 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글출처 국민일보 2011.08.25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285360&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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